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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Chees) 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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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즈의 종류 급속한 변화 속에 귀하기만 했던 유제품 중 치즈도 이젠 없어서는 안 될 값싸고 질 좋은 제품으로 흔하게 우리 주변에 다가왔다. 치즈에 대해 알아보자. 치즈란 우유, 탈지, 부분 탈지, 크림, 버터밀크 등을 원료로 하여  여 기에 젖산균, 랜 등 기타 적합한 단백질 효소분해. 산등을 첨가하여 케이신을 응고시킨 후, 유청을 분리 후 가열. 가압 등의 처리를 한 후 만들어진 유제품을 말한다.  치즈는 언제부터 식품으로 이용했는지는 분명히 밝혀진 것은 없으나, 이집트의 기록을 보면 B.C 3,000년 경에 버터와 치즈가 이용되었다고 한다. 고대 로마, 그리스 문명은 B.C 1550~ 750년 번성기에 치즈가 널리 이용되었으며, Christ시대에 유럽에서는 젖소가 널리 분포되는 시기로, 지금의 프랑스, 네덜란드, 스위스 부근에서 치즈 제조가 발달, 10세기 전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치즈 품종이 확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치즈의 종류와 조성에 대해 알아보자. 전세계에서 만들어 지는 치즈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아마도 4~500여 종의 치즈가 있는것  알 려지고 있다.   ㅇ연질 치즈 Soet chees 숙성시키지 않은 치즈로 Cottage 치즈, Bakers 치즈, Cream 치즈, Neufchatel 치즈 등이 있으며, 박테리아. 효모, 곰팡이에 의해 숙성시키는 치즈로는 Romandur 치즈, Bel Prese 치즈, Camenbert 치즈, Brie 치즈, Ricotta 치즈, Neufchatel 치즈, 등 여려 종류의 치즈가 있다. 이들 치즈는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숙성시키지 않는 연질 치즈 중  ㅇCottage cheese는 세계에서 널리 만들어지고 있는 치즈로, 네덜란드 산이 유명하며, 원래는 우유를 자연 젖산 발효시켜서 만들었다. 이 치즈는 Dutch cjheese, Pot cheese 또는 Curs입자가 Popcorn과 비슷해 Popcorn cheese라고도 부른다. 이 치즈는 처음에는 전유로 만들었으나

북한산성 유적지 중흥사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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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증흥사 권역 북한산 국립공원 양주 북한산성에서 대서문을 지나~ 중성문 위로 오르다 보면 북한산성 중흥사 권역이 나온다. 중흥사 권역은 중흥사를 중심으로, 태고사, 산영루지, 부왕사지, 중창지, 선정비군, 북한승도절목 등의 문화재가 집중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1711년 북한산성이 축성되기 이전에는 북한산에서 가장 중심이 죄는 지역이었다. 중흥사, 태고사, 산영루 등은 북한산성 축성 이전부터 있던 것이며, 그외는 축성 이후 세워졌다.  그 옛날 부흥했던 북한산의 중흥사 권역을 탐사해 본다. 북한산 중흥사 권역 ①중흥사지(重興寺址)는 북한산성 내의 승영 사찰과 승병 350여 명을 관리하고 지휘하던 승군 사령부가 있던 사찰이었다.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려진 바 없으나, 고려시대 만들어진 향로에 삼각산 중흥사라는 명문이 있어 12세기 이전에 세워진 사찰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산성의 죽성을 기록한 북한지(北漢誌)에 보면 중측 하여 136칸의 웅장한 큰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1915년 대홍수 때 사라진 것을 근대에 와서 대웅전과 요사채를 복원해 놓았다. 복원한 북한산 중흥사 ②산영루지(山映樓址) 산영루는 중흥사 아래 계곡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설치된 군영인 총융청에서 관리하던 건물로, 조신 실학자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당대 유명한 많은 지식인들이 시문을 많이 남기기도 하였는데, 19세기 초 대홍수 때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져 안타깝기만 하다. 2015년 역사문화 복원사업으로 산영루를 복원시켜 놓았다. ③부왕사지(扶旺寺址)는 조선시대 북한산성 축성때 111칸 규모로 창건한 승영사찰로 20세기까지 멕락을 유지해 오다 6.25전쟁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현재에는 임시건물이 건립 사찰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④중창지(中倉址) 북한산성 축성 이후 전란에 대비하여 식량을 보관하던 창고로, 중흥사 앞에 있었는데 19세기 말 모두 소실되어 사라졌다.     ⑤북한산 선정비군(善政碑群)은 산영루 건너 바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비석

경기명산 경기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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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명산 오악(京機 五岳) 경기도에는 악(岳) 자가 들어간 5개의 명산이 있다. 파주의 감악산(紺岳山), 포천의 운악산(雲岳山), 가평의 화악산(華岳산), 과천의 관악산(冠岳山),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은 갈 수 없는 북녘땅 송악산(松岳山)이 있다. 예로부터 경기도의 명산 5개의 산을 경기 오악(京機 五岳)이라 불었다. 옛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경기 오악(京機 五岳)이라 하고 있다. 경기 오악의 대해 알아본다. ①파주의 감악산(紺岳山) 675m 감악산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남면, 그리고, 연천 전곡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예로부터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흘러나온다고 하여 감악(紺岳)이라 했다. 감악산에는 감악사, 운계사, 범륜사, 운림사 등 4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현재에는 옛 운계사터에 근래에 와서 재 창건한 범륜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금악산 주봉 부근 장군봉 아래 옛 조선 명종 시절의 의적 임꺽정이 관군을 피해  숨이 지냈다는 임꺽정 굴이 남이 있는데, 대단히 험준한 곳에 위치해 있다. 운악산(雲岳山) 미륵바위 ②운악산(雲岳山) 936m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과 가평 하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주봉인 망경대를 둘러싼 경관이 경기의 소금강이라 불릴 만큼 산세가 험준하고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운악산에는 천년고찰 현등사와, 백년 폭포, 오랑캐 소, 눈썹바위, 큰골 내치기 암벽, 망경대, 무우촉포, 코끼라바위,노채애기소등 운악의 8경은 빼어난 비경을 자랑하고 있다.     ③관악산(冠岳山) 629m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경기 안양시, 과천시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관악이란 산의 모양이 관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의 산이다. 관악산은 예로보터 우암 송시열은 최치원의 광분첩석을, 추사 김정희는 단하시경을 암각하는 등 많은 학자들과 문인들이 빠어난 산세를 에찬하였다.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가 많으며, 산봉우리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에서는 화산이 된다. 빼어난 바위와 봉우리 오래된 고목과 수많은 야생화가 어우러져 철 따라

북한산의 산성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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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北韓山城) 사적 제162호 북한산 국립공원 북한산에는 종 12.7km의 산성길이 있다.  삼국 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한산에 도성민의 땀으로 성을 쌓았다. 조선시대만 해도 13개의 성문, 130칸의 행궁, 140칸의 군창, 우물 99개소, 저수지 26개소가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파괴 방치 되고 있던 것을 서울 정도(定都) 600년 을 맞아 1990년부터 시작된 북한산성 제모습 찾기 사업으로 산성의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다. 오늘은 북한산의 13개의 산성(山城)문에 대해 알아본다. 북한산(北漢山)     ①북한산성의 대문 격인 대서문(大西門)은 북한산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산성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이용하던 성문이기도 하다. 현재의 문루는 1958년에 복원해 놓은 문으로 산성의 문루중 가장 오래된 문이다. ②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은 의상봉과 용출봉사이 고갯마루에 위치해있는 암문으로, 숙종 37년에 산성 석곽을 축조하면서 만든 암문으로, 현재의 백화사가 위치한 의상봉길에서 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암문은 비상시 식량, 군비를 몰래 반입하기 위해 만든 비상문을 말한다. ③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은  북한산의 나월봉과 증취봉 사이 고갯마루에 있는 암문으로, 높이 9척, 너비 8척의 암문이다, 예전에 삼천사에서 가까운 신혈사에서 고려시대 임금 현종을 구한 적이 있다 하여 왕을 도운 계곡이라 하여 부왕동(扶王洞)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④청수동암문(靑水洞暗門)은 북한산의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는 문으로, 숙종 37년에 석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암문으로, 탕춘대성과 비봉에서 성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통제하기위해ㅔ 설치하였으며, 여느 암문과 같이 문루는 없다, ⑤대남문(大南門)은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서남문으로도 불리며, 비봉능선을 통해 탕춘대성과 연결되는 전략작 중요한 성문이다. 상

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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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257호 운현궁(雲峴宮) 흥선 대원군의 사저이자 고종의 잠저(潛邸) 운니동 운현궁 종로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을 탐방해 보았다. 운현궁은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高宗)이 등극 하기전에 살았던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사저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에서 10여 년간 집정하면서 이린 아들 고종 임금을 대신해 정치를 하였다. 운현(雲峴)은 기상관측을 맡아보던 서운관(書雲觀) 앞에 있는 고개의 이름으로, 고종이 등극하기 전 살았던 집인 관계로 운현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 고종이 임금이 된 이듬해 흥선대원군의 생활공간인 사랑채 노안당과  안채인 노락당을 지었다.  그 당시에 별당인 이로당과 지금은 운현궁으로 나뉜 영로당을 지었다. 흥선대원군은 아들을 대신해 10여 년간 이곳에서 국정을 이끄는 정치를 하였다.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수 있도록 고종 임금의 전용 경근 문과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 문을 두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이며, 노락당은 안채, 이로당은 별당으로 사용하였다. 그 규모나 격식, 평면 모양으로 볼 때 사대부집 이라기보다는 궁궝의 내전에 가까웠다.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나면서 큰 아들인 이재면을 겨쳐, 손자 이준용에게 상속되었으나 6.25 전쟁으로 상당 부분이 팔리면서 운현궁의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다. ①수직사(守直舍)는 운현궁 정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로, 운현궁을 지키는 수하들이 사용하였다.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커지면서 궁에서 군졸을 파견 경호 임무를 마꼈다. ②노안당(老安堂)은 흥선대원군 주된 거치로 운현궁의 사랑채다. ③노락당(老樂堂)은 운현궁의 안채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라 할 것이다.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 ④이로당(二老堂)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였다. 노락당이 안채에서 별궁 역할을 하자 새로운 안채가 필요하게 되어 이로당을 새로 지었다. 이로당 뒤편에 있는 민속문화재 19호로 지정되어있는 김승

정월대보름날 오촌댁 지신밟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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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민속박물관 오촌댁 앞마당 기축년 한해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세시풍습  정월대보름날 국립 민속박물관에서 펼쳐지는 볏가릿대 세우기, 지신밟기와 함께 즐기는 민속놀이 행사 경복궁 국립 민속박물관에서 기축년 정월대보름을 맞이하여 2월 26일 오후 1시 반부터 민속마을 오촌댁 앞마당에서 볏가릿대 세우기와 지신밟기, 등 여러 세시풍습 행사가 열리고 있어 관람해 보았다. 어렸을 적 가물가물 기억이 난다. 기억하는 그때는 사당패가 동네로 들어와 집집마다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한해 풍요와 액운은 떠나고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신명 나게 한판 벌이던~~ 지신밟기 하던 그때가 새삼 떠올라 더욱 즐거운 관람을 해 보았다. 국립 민속박물관 오촌댁(梧村宅) 오촌댁은 조선 후기의 경상도 지방 부잣집 가옥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오촌댁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 1리에 실제 있었던 가옥을 오촌댁 후손으로부터 기증받아 옮겨와 복원해놓은 가옥이다. 이 가옥을 해체하는 중 상랑 문이 발견되어, 1848년에 지어진 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오촌댁 앞마당에 풍물패가 들어와 신명 나게 한판 벌이고 있다. 오촌댁 앞마당에서 펼쳐지는 풍물패 놀이 동영상 짚풀을 이용해 만든 민속 공에품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 선조의 지혜를 엿볼 수가 있다. 짚풀을 이용하여 볏가릿대를 세웠다. 볏가릿대 전수자들이 섬세란 손놀림으로  대나무에 짚을 엮는 모습을 처음부터 재현하였다. 볏가릿대를 세워놓고 집안의 나쁜 액운은 물러나고 건강하고 올 한 해도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고사를 재현하고 있다. 고사기 끝이 나자 풍물패의 한바탕 놀이와 함께 지신 밟기가 시작된다. 한바탕 놀도 집안으로 들어가 구서구석 돌아본다. 집안을 돌아본 후 뒤꼍 장독대에서 마지막으로 기원을하며 지신 밟기 행사가 끝이 났다. 참 오랜만에 보는 놀이였다. 볏가릿대 세우기와 지신밟기는 한 해의 건강을 기원하는 마을 공동체 의식이 담긴 정월대보름날, 주로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풍속이라고 한다. 볏

울산 울주 반구천 명승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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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주군 자연유산 울주 반구천 일원 명승 지정된다. 자료출처/문화재청 울주군에 있는 자연유산인 반구천(盤龜川) 일원을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으로 지정 예고하였다.  울주 반구천 일원은 천마산에서 발원한 물길이 연화산 등을 굽이치며 수많은 절벽과 협곡, 옛 물길인 구하도, 습지 등을 만들어내며 다양한 지형과 숲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구곡(九曲) 문화와 함께 저명한 정자 등 자연경관, 역사문화경관이 복합된 명승으로서 가치가 뛰어난 자연유산이다. 반구천은 현재의 대곡천의 옛 이름이다. 반구대 암각화 암반 이 일대는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층으로, 초식공룡과 익룡의 발자국 화석이 있으며, 특히 암각화 인근의 신생대에 멸종한 코리스토데라(Choristodera)  발자국은 세계 최초로 발견되어 노바페스 울산엔시스(Novapes ulsanensis)로 명명까지 된 한반도 공룡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집청정에서 본 반구대  최근 세계유산 우선 등재목록으로 선정된 선사시대 고래사냥 모습의 암각화인 국보「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국보「울주 천전리 각석」, 정몽주(鄭夢周)가 유배 중 머문 반구대의 다른임름인 포은대(圃隱臺)와 울산시 유형문화재「반고서원 유허비(槃皐書院 遺墟碑)」, 반구서원(盤龜書院), 집청정(集淸亭) 등은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우리 조상들의 생활과 유람 문화까지 알려주어 역사문화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반구천의 아름다운 경관은 구곡(九曲) 문화를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남긴 시, 글, 그림으로 남아있으며, 특히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공회첩(孔懷帖」에 남긴 반구(盤龜) 그림을 통하여 이곳이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복합 명승으로서 손색이 없는 자연유산임을 알 수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 200-1번지 울주 반구천 일원(蔚州 盤龜川 一圓) 명승 지정 요약 ①자연경관이 뛰어난 곡류 하천과 공룡 화석 발자국 등

남산골 전통 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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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 아래 남산골 전통 한옥마을 남산 북쪽 기슭 한옥마을이 들어선 필동 주변은 조선시대만 해도 맑은 물이 흐르는 산골짜기에 천우각이 있어 여름철 피서를 겸한 놀이터로 한양에서는 이름 있는 곳으로, 청학이 사는 선향이라 하여 청학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남산 아래에 골짜기를 만들어 물이 흐르게 하고, 정자와 전통정원을 조성, 서울시내의 서울 민속자료로 지정된 전통한옥 다섯 채를 이곳으로 이전 복원하여,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의 신분에 맞는 가구 등을 배치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남산 전통정원 한옥마을 한옥마을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소원을 빌어보자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의 가옥으로, 청계천 부근인 중구 삼각동에 있던 집을 이전 복원하였다. 서울 민속자료 20호로 지정되어있다.     관훙동 민씨 의 가옥으로 종로구 관훈동에서 이전 복원해 놓은 가옥으로 서울 민속문화재 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독대의 규모로 보아 집안 살림규모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삼청동 오유장 김영춘의 가옥으로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해 놓았으며, 서울 민속자료 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영택 재실로 제기동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해 놓았으며, 서울 민속자료 24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가 원(元) 자를 이루고 있는 좀 특이한 형태의 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가옥이라고 한다. 순종의 장인 해풍부원군이 그의 딸 순종효 황후가 1907년 창덕궁으로 들어갈 때 지은것으로 순종이 제사하러 와 머물 때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만든 재실이라고 한다.  대보름을 맞이하여 윷놀이 점을 쳐 보고, 대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달님에게 소원을 빌어본다. 옥인동 윤씨가옥으로 종로구 옥인동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해 놓았으며, 서울 민속자료 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올해는 코로나 거리두기로 대보름맞이 특별 행시는 열리지 않아 좀 아쉽기도 하다. 대보름맞이로 한옥마을을 찾아 둘러보았다.

세종시 비암사 극락보전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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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 비암사   극락보전 보물 지정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자료출처/문화재청 세종특별자치시는 2012년 특별자치시 승격 이후 건축문화재로는 처음으로 비암사 (碑巖寺 極樂寶殿)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신청, 문화재위원회에서 가치가 충분하다는 판단에 따라 이번에 보물로 지정하였다. 비암사는 통일신라 도선(道詵)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창건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673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국보 제106호)이 비암사에서 출토되었고, 지금까지 이 고장에서 비암사를 ‘삼한고찰(三韓古刹)’로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찰의 창건 시기는 고대로 거슬러 볼 수 있다.     비암사(碑巖寺)의 극락보전(極樂寶殿) 은 정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일반적인 측면 3칸형에서 벗어난 2칸형 불전으로, 전란 이후 사찰 경제가 축소된 사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공포의 구성은 크기에 따른 대첨차, 중첨차, 소첨차를 모두 사용한 특징을 보이며, 첨차를 배열한 방식, 내외부의 살미 모양 등에는 조선 중기 이후 다포 건축물에 보이는 특징들이 잘 반영되어 있다.  ㅇ살미, 첨차는 기둥 위에서 십자 모양으로 짜이는 공포 부재로, 살미는 건물 전면으로 내민 초가지를 말하고, 첨차는 도리방향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 부재, 첨차는 크기에 따라 대첨과 소첨으로 나누며, 그 중간 크기를 중첨이라 한다. 극락보전의 가구 구조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소는 옆면 규모라 할 수 있다. 옆면이 2칸이면서 팔작집을 지으려다 보니 일반적인 상부 가구 구성으론 대응이 쉽지 않았다. 보통 건물에서는 충량 1본을 두었으나, 극락보전은 충량을 좌우 협칸에 각각 3본씩 설치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옆면 주칸이 긴 편이어서 충량을 보조로 설치하여 추녀에 걸리는 하중을 감당하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ㅇ충량은 한쪽 끝은 기둥 위에 짜이고 한쪽 끝은 보에 걸치게 된 측면의 보를 말한다.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