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

사적 제257호 운현궁(雲峴宮)

흥선 대원군의 사저이자 고종의 잠저(潛邸)


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
운니동 운현궁

종로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을 탐방해 보았다. 운현궁은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高宗)이 등극 하기전에 살았던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사저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에서 10여 년간 집정하면서 이린 아들 고종 임금을 대신해 정치를 하였다.


운현궁 앞마당


운현(雲峴)은 기상관측을 맡아보던 서운관(書雲觀) 앞에 있는 고개의 이름으로, 고종이 등극하기 전 살았던 집인 관계로 운현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 고종이 임금이 된 이듬해 흥선대원군의 생활공간인 사랑채 노안당과  안채인 노락당을 지었다. 그 당시에 별당인 이로당과 지금은 운현궁으로 나뉜 영로당을 지었다. 흥선대원군은 아들을 대신해 10여 년간 이곳에서 국정을 이끄는 정치를 하였다.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수 있도록 고종 임금의 전용 경근 문과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 문을 두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이며, 노락당은 안채, 이로당은 별당으로 사용하였다. 그 규모나 격식, 평면 모양으로 볼 때 사대부집 이라기보다는 궁궝의 내전에 가까웠다.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나면서 큰 아들인 이재면을 겨쳐, 손자 이준용에게 상속되었으나 6.25 전쟁으로 상당 부분이 팔리면서 운현궁의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다.

운현궁

①수직사(守直舍)는 운현궁 정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로, 운현궁을 지키는 수하들이 사용하였다.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커지면서 궁에서 군졸을 파견 경호 임무를 마꼈다. ②노안당(老安堂)은 흥선대원군 주된 거치로 운현궁의 사랑채다. ③노락당(老樂堂)은 운현궁의 안채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라 할 것이다.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 ④이로당(二老堂)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였다. 노락당이 안채에서 별궁 역할을 하자 새로운 안채가 필요하게 되어 이로당을 새로 지었다. 이로당 뒤편에 있는 민속문화재 19호로 지정되어있는 김승현 가옥은 원래 운현궁에 속한 건물 중 하나로 당시에는 영로당(永老堂)이라 불렀었다.


운현궁 박물관

운현궁 이로당을 나오면 우측으로 흥선대원군의 유물 관련 유물 전시를 하는 건물이 있다. 여기 전시하는 ①운현궁 규모 모형 ②흥선대원군의 유물, 가례 복장, 생활용품 등은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 전시되는 유물은 복제품이며, 실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③국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관직, 관작, 자격, 시호, 노비 등을 내려주는 문서와, 노락당 건물 상랑문, 화조도 그림


대원군 실각 시절 정세


①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을 하자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1876년 개항한 조선은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채제로 편입되면서, 결국에는 씻을 수 없는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②흥선 대원군의 쇄국양이, 흥선군 시대는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가는 과도기 시대였다. 항쟁과 보수 유생들의 비판으로 결국 물러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③, ④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려는 미국이 강화도를 참략한 신미양요와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따른 보복으로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으로 병인양요 후 대원군은 강화를 외국배는 절대 통과할 수 없다는 쇄국양이 정책을 확고히 했다.


고종 친영례 복장

①, ②친영례 복식, 고종과 명성황후 가례 중의 친영례. 고종은 면복을, 명성활후는 적의를 입었으며 흥선대원군은 조복을, 부대부인은 왕삼을 입었다. ③흥선 대원군의 복식 개혁과, 과도한 납세로 원망스럽게 납부하는 돈이라는 원납전과 , 과도한 경복궁 중건으로 고갈된 재정을 메꾸기 위해 주조했던 당백전

흥선 대원군의 사저 운현궁을 찾아 우리나라 조선말기 시대의 급변하는 정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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