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 (廣開土大王陵碑)

역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 시대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해  알아본다.


고구려 14대 왕인 광개토대왕(374~413)의 업적을 기리기위해  아들인 장수왕(394~491)이 세운비(碑) 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에 세워진 것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비(碑)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비(碑)이다. 비문에는 고구려 건설 설화 등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자세하게 기록 새겨져 있다.

광개토대왕이 한반도에 침입한 왜군들을 여러차래 격파하였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1면 9행의 신묘년조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잘못 해석되기도 하였다. 광개토대왕비는 자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밝히는 열쇠가 되는 유물로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영토를 자국으로 편입시키려는 중국 동북공정이 잘못된 것임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주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광개토대왕릉비
전쟁기념관 복제품/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4면의 글 중 번역문 1면의 내용을 살펴보자.

옛적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이 있었다. ㅁㅁㅁ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 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 때가 물 위로 떠 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 곡 홀본 서쪽 산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왕이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 왕은 도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으며, 대 주류 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 세손에 이르러 국강상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 대왕이라 하였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치었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세워 후손에 전한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패려 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력질이 끊이지 않으므로, 영락 5년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그 3개 부락 600~ 700 영을 격파하니, 노획 환 소. 양. 말의 수가 헤아릴수가 없었다. 영락 6년 병신(丙申)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白殘國)을 토벌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광개토대왕릉 1면에 새겨진 내용을 알 아 보았다. 


고구려역사


고구려 전성기의 강역

고구려는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기원전 37년에 압록강 유억을 중심으로 세운 고대국가로 668년에 멸망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나라로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명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고구려의 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은 대외적인 정복 활동을 강력 추진하였다.

북으로는 후연을 쳐서 요동을 차지하고,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의 주인이 되었다. 남으로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해 임깆강과 한강까지 영토를 넓혔다.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장수왕(394~ 491)은 427년 압록강변의 국내성에서 대동강변의 평양성으로 수도를 옯기고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장수왕의 활약으로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 동쪽으로는 북간도 흔춘, 남쪽으로는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상으로 간략하게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해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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