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사 박물관 서울살이

 생활사 박물관

서울살이

서울에서 살아온 서울 사람의 이야기

서울시민의 삶

지난 일 백 년 동안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많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백 년 전 서울에는 20만 명 정도가 살았다고 하는데,  세월이 흘러 현제는 50 여배가 늘어난 1,000만 명이나 거주하고 있다. 지방으로부터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한양 사람의 후송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로 일 것이다.

기적의 땅 서울
기회의 땅 서울

파리와 뉴욕에 사는 "파리지앵"과 "뉴요커"는 그들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서울 사람들도 "서울내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들만의 독특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서울 주만 가운데 "서울내기"라는 정체성보다는 그들이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귀속감을 더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즉 서울 사람보다는 서울에 사는 사람이 대다수인 것이다. 해방 이후, 서울에서 나고 자란 새로운 서울내기의 들장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 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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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들어서면서 서울 토박이가 부각이 되었다. 고도 성장기 동안  지방에서의 유입 인구가 크게 늘면서 상대적으로 서울 토박이의 희소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시에서도 이러한 흐름에 보조를 맞추어 1994년 조선왕조가 한양을 도읍지로 정한 600주년 되는해를 기념하여, 서울 토박이들을 발국하여 지정하는 사업을 벌였다.

 

 

서울시가 정한 토박이 선정 기준은 1910년 이전부터 한성에 살고 있었던 사랍들이었다. 즉 한성부 후손들만 을 서울 사람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1994년 각 구청 별로 서울 토박이에 대한 신청을 받은 결과 3,605가구 1만 3,753명으로 서울 시민의 0.12%만이   서울 토박이로 확인이  되었다. 같은 해 서울 토박이회 라는 단체도 탄생을 했다.

서울의 터줏대감 토박이

서울 토박이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한양의 거주민들은 북악산 아래 북촌, 남산 아래 남촌. 동대문 낙산 부근의 동촌, 서소문의 서촌, 그리고 장교와 수표교 부근의 중촌에서 양반들은 붕당 별로, 상민과 중인들은 신분별로, 나뉘어 거주하였다.

일제 강점기가 되자 양반 관료들 일부는 실직자가 되어 연고지로 내려가도 하였다. 그러나 자녀 교육을 이유로 상경한 시골 지주들이 계동이나 가회동 등 북촌에 신시을 절충한 새로운 양식의 한옥을 짓기 사작하였다. 서울 토박이는 이들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조상의 후손으로 3대 이상 서울에 거주한 터줏대감이다.

서울 토박이

동서남북의 네 마을에는 양반이 살되 북촌에는 반문(문신), 남촌에는 무반(부신)이 살았다. 서촌에는 소롱이 많이 살았고, 북촌에는 주로 노론이 많이 살았다. 남촌에는 남인이 많이 살았지만, 소론들도 일부 섞여 살았으며, 주로 무반이 많이 살았다. 중촌에는 중인들아 모여 살았으며, 우대는 육조이하의 여러관청에 서리나 고지기 무리들이 모여 살았다. 특히 다동이나 상사동 등지에는 상인들이 많이 살었고, 아래대는 여려 군영의 장교와 집사들이 살았다. 

궁궐을 중심으로 하여 경복궁 서쪽의 누하동 근처에는 대전 벌파라고 불리던 궁궐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창덕궁 동쪽의 연지동과 원남동 근처에는 굴궐을 지키는 뮤예별감이 모여 살았다. 동소문안 성균관 근처에는 성균관에 예속되어 일을 거들면서 쇠고기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살았으며, 왕십리에는 하급 병졸들이 모여 살았다. 오강(五江)의 강변에는 뱃사람과 상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속칭 강대사람 이라고 부른것을 이들 강변에 사는 사람을 가리킨 것이었다. 

커져가는 서울
커져가는 서울

서울은 공간적으로 크게 확장되어 갔다. 해방 전에는 사대문 안과, 북한산, 용산, 전농동, 신촌등 도성 바깥 10리까지의 구역이었다. 해방 이후 관할 구역이 넓어지기 시작하여, 성북구까지 편입되면서 면적이 2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서울은 1963년 크게 다시 한번 확장되었다. 광주군, 양주군, 시흥군 등 5군 6면 84리가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크게 확장하였다. 한강 이남 지역이 크게 편입되었다.

피란민의 안식처 해방촌

해방촌의 삶

언제부터인가 남산 남쪽 기슭에는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 하었다. 사람들은 해방 직후 형성된 마을이라 해방촌이라고 불렀다. 평안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다. 해방촌 주민들은 남산을 넘어 남대문시장에 나가 노점상, 날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해방촌 주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내려온 월남인들인 만큼 똘똘 뭉처서 살아야만 했다.


서울로 서울로 모여드는 사람
서울로 모여드는 사람들

1960년대 이후 서울은 공간적으로도 확장되었지만 인구도 많이 늘었다. 여유 있는 집안은 교육상 서울로,  지방 사람들은 잘살아보세 를 외치면서 대거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무작정 상경 이란 유행어가 생겨 났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사람

행상, 막노동 등 힘든 일에 매달리던 시기 었다. 1960년대 서울역 부근에는 무작정 상경하고 본 젊은이들이 많았다. 이들이 경제개발과 맞물려 한강의 기적에 밑거름이 된 주역들이다. 공릉동 생활사 박물관에서 전사하고 있는 서울살이를 간추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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