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일생

 한국인 의 일생

Korean Life Passages

한국인은 태어나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기까지의 일생을 살펴본다.



국립 민속박물관에서 한국인의 일생을 전시하고 있는데, 17세기~ 19세기까지 양반 사대부 집안에서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주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유교이념이 강했던 조선시대에는 가계 계승이 가장 중요시하던 시기여서 출산 전부터 남자아기를 원했다. 아기가 출생을 하면 백일잔치나 돌잔치를 열어 아기가 무사히 성장한 것을 축하했다. 

남자는 20세에 관례를, 여자는 15세에 계례를 치러 어른으로 인정을 받고, 혼례를 치러 가족을 구셩했다. 남자는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고, 여자는 안주인으로 집안 살림을 관장하는 중요한 의무로 여겼다. 죽음에 따른 가족의 슬픔은 삼년상이라는 장례 절차를 통해 극복했고, 돌아가신 조상은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자손의 번창과 친족의 화합을 꾀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사회적, 법적 관습에 의해 가계 계승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졌다 때문에, 어느 집안에서나 아들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삼신할머니에게 자손번창과 부귀다남, 특히 건강한 아기 출산을 기원했다.

출산을 하면 대문에 금줄을 쳐 아이의 출생을 알리고 부정한 출입을 막았으며, 태(胎)를 태항아리에 넣어 보관, 또는 깨끗한 곳에 묻거나 불에 태워 아기가 잘 자라기를 기원하였다. 당시 시대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기에,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면 백일잔치를 열어 비로소 축하하고, 1년 후에는 돌잔치를 열어 아이의 장래를 점쳤다.

 

 



경상도 안동지방에 전래되는 비손 
"이 댁 가정에 귀항 아기는 태산같이 높으그러 나라에는 충신동이 부모에는 효자동이 일가에는 화목동이 친구에는 유신동이 세상천지 으뜸 동아 동방석이 명을 빌고 강태공의 날을 빌어 선팟십 후팔십 일백 예순 살을 점지를 하옵시고요"라는 비손이 있다.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기에 애틋한 소망이다.

엄마가 아기를 잠재울 때 아기 가슴에 손으로 토닥이며 부르는 전래 자장가를 기억하십니까!!    "자장자장 우리 아기 우리 아기 잘 도잔다. 마루 밑에 삽살개야 멍멍멍 멍 짓 말고 앞마당의 꼬꼬닭아 꼬꼬닭 닭 우지 마라 담벼락에 참새들아 짹짹짹 짹 우지 말고 지나가는 바람님아 발뒤굼치 들고 가라 나라에는 충신동이 부모에는 효자동이 형제간의 우래동이 동기간의 화목동이"그 옛날 어머님이 불러주던 그리운 자장가 새심 그리워진다.

삼신 상과 삼신 단지
삼신은 아이를 점지해 주고 출산 후에는 아이의 건강과 산모를 돌봐주는 신으로 삼신이라고 한다. 삼신 상은 출산을 도와준 삼신에게 고마움의 의미로 올리는 상으로, 흔히 방안 윗목에 두었다. 삼신 단지는 아이를 점지하고 산모를 보살피는 삼신의 신체로 단지 안에 쌀을 넣고 한지로 덮은 후에 주로 안방의 서렁 위에 올려놓았다.


서당과 윤리교육
조선시대 때에는 한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자의 뜻과 음을 익히기 위해 천자문을 배웠다. 또한 기초적인 소양을 위해 삼강오륜과 옛 성현의 행적을 정리한 동몽선습 이나 소학, 가족 예절서인 주자계를 배웠다. 또한 유교적 덕목과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량교나 서원에서 유교 경전인 사서삼경과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 절요를 공부하고, 문장 작성을 익히기 위해 중국의 명문장을 모아 놓은 고문짐보 등을 암송했다.


조선시대 집필 기구, 문방구

문방구는 조선시대 때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용품으로, 글방이나 서재에 갖추어 놓은 물건이라 하여 문방구로 불이었다.

군자의 길
조선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미음을 닦고, 자시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배려, 군자의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광산 김씨 예안파가 예안에 정착한 것은 21세 농수 김효로 때부터 였다.  김효로는 26세때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뜻을 두디 않고 독서로 여가를 보냈다.

김효로의 두 아들 김연과 김유는 가문에 터를 닦은 인물이다. 김연은 생원과 진사시 합격 관직에 올라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동생 김유는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평생 독서하며 가장 오래된 조리서 중 하나인 수운집 방을 집필하였다.

김연, 김유의 아들 다섯 종형제는 퇴계 외항의 수제자로, 여러 사람들에게 군자라 불렀다. 이들의 후손 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광산 김씨 예안파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국학진흥원 기탁 자료와 광산 김씨 집안에서 소장 중인 자료를 중심으로 꾸며 민속박물관에서 군자의 길 이란 타이틀로 전시하고 있다.

조선 선비의 일상
매상 인시(03시~ 05시) 의관을 정재 한다.
일출 묘시(05시~ 07시) 아침 문안을 드린다.
식시 진시(07시~ 09시) 자녀를 교육한다.
우중 사시(09시~ 11시) 손님을 맞이한다.
일중 오시(11시~ 13시) 집안을 점검한다.
일질 미시(13시~ 15시) 여가시간을 보낸다.
일포 신시(15시~ 17시) 천천히 독서를 즐긴다.
일입 유시(17시~ 19시) 전멱 문안을 드린다.
황혼 술시(19시~ 21시) 하루 일과를 정리한다.
인정 해시(21시~ 23시) 잠자리에 든다.
야반 자시(23시~ 01시) 깊은 잠ㅇ든다.
계명 축시(01시~ 03시) 첫 닭이 울면 일어난다.

시집 장가 기는 날

조선시대에는 남녀 구별이 엄격한 유교 사회로 중매결혼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중매는 남자와 여자의 생년, 월, 일을 적은 사주단자로 궁합을 맞추고, 혼가가 결정되면, 일종의 혼인 증명서인 혼서지와 예물을 납폐함에 담아 보내 약혼을 증명했다.

혼인절차는 신랑이 신부집에 나무 기러기를 바치는 전안례, 신랑고 신무가 맞절을 하는 교배례, 신랑과 신부가 술잔을 서로 바꿔 마시는 합근례 순으로 진행되었다. 중국의 가족 예절서인 주자가례에는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짐으로 맞이하여, 초례를 치르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시대 한국인의 일생 중 태어나서 결혼까지 일상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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